안달루시아 게바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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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꿈꾸는 마을 마리날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2700명 소도시
직접 민주주의·협동조합·공동경작…
무상의료, 무상주거… 빚질 일이 없어
경찰은 없고, 혁명가와 시인을 사랑하는 마을

‘우모소’ 농장에서 일한 지도 22년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농부로 살았다. 사람들은 안토니오(52)에게 삶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스페인에서도 개발이 안 된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마을 마리날레다에서 꼬박 반백년을 살았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다. 안토니오는 스스로 선택하고, 몸을 던져 지켜냈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언젠가 우모소 농장은 안달루시아 대지주의 땅이었다. 안토니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 땅에 고개를 조아렸다. 안토니오와 친구들의 삶은 달랐다. 2013년 12월14일 현재, 1200ha(12km²)에 이르는 땅은 마리날레다 주민 대부분의 경제를 받쳐주는 지반이다.

우모소 농장

정오가 가까워오자 초겨울에도 안달루시아의 햇살은 눈부셨다. 상추 모종에 비료를 주던 안토니오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멀리 우모소 농장의 입구가 보인다. 한때 장원의 재산을 지켜주었을 하얀 담장에는 하나의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Este cortijo es para los jornaleros en paro de Marinaleda”(이 농장은 마리날레다의 소작농을 위한 것이다). 안토니오에게 우모소 농장은 그가 선택해 일군 유토피아다.

1991년 마리날레다의 소작농들은 오랜 투쟁 끝에 대지주의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받았다. 이 ‘무혈혁명’은 인구 2800명, 면적 25km²의 작은 마을 마리날레다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공동체로 만들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서구 언론은 이 마을을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는 숱한 몽상가들이 이 마을로 모여드는 이유다.

안달루시아 구릉지대의 황금빛 올리브나무 물결 속에서 마리날레다 마을은 그처럼 떠들썩한 관심이야 상관없다는 듯 한적했다. 주도인 세비야에서 동쪽으로 108km 떨어진 이 마을은 일부러 찾는 이가 아니라면, 좀체 다다르기 어려운 곳이다. 마을 중심부인 시청에 이르면 그제야 마리날레다의 ‘본색’이 드러난다.

쿠바나 베네수엘라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그라피티와 벽화가 번연히 시청 앞 거리에 그려져 있었다. “TV를 끄고 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자본에 저항하는 사회적 전쟁” “단결된 마을은 누구도 억압할 수 없다” 같은 구호들이다. 고개를 돌려 시청을 바라보니 그 외벽에도 구호가 프린팅돼 있다. “마리날레다, 평화를 향한 유토피아.” 시청 건물에 새겨진 ‘유토피아’라니,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것이 아닌가.


마리날레다 로고 옆에 그려진 체 게바라의 얼굴

공공연히 왕정을 부정하는 마리날레다 시내에는 스페인 왕국의 깃발이 없다. 경찰도 없다. “경찰이 없으니 한 해 예산 가운데 3억7천만원가량이 절감된다”는 설명이다. 대신 그들은 혁명가와 시인을 지지한다. 독재자 프랑코를 기리던 광장은 칠레의 첫 좌파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이름으로 갈아입었다. 공공체육관 외벽에는 거대한 체 게바라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거리에는 스페인의 국민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이름 붙였다. 스스로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자긍심은 마리날레다 어디에서나 쉬 읽혔다.

마리날레다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마을에서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만날 수 있는 우모소 농장에선 올리브를 비롯해 아티초크, 콩, 고추 등을 재배한다. 농장에 붙어 있는 제1공장에서는 올리브오일을, 마을 외곽의 제2공장에서는 통조림을 만든다. 생산품의 70%는 다른 식료품 업체에 판매하고, 30%는 ‘우마르’라는 자체 브랜드로 판매한다.

마리날레다의 주요 결정은 모두 주민회의를 통한다. 월평균 세 차례 열리는 이 회의에서 후안 마누엘 산체스 고르디요 시장은 직접 의제를 설명한다. 늘 300~400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주민들은 시장마저 탄핵할 수 있다.

농장과 공장을 꾸려가는 것은 ‘우마르’ 협동조합이다. 마리날레다가 ‘사회주의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것은 이 협동조합 때문이다. 마리날레다의 모든 노동자는 노동자연합(SOC)이라 불리는 노조에 가입돼 있다. 이들은 업무에 관계없이 동일 임금을 받는다. 하루 47유로(약 7만원)씩 월평균 1200유로(약 180만원)다. 넉넉하진 않다. 스페인의 최저임금이 월 700유로를 넘지 못하는 점을 고려하면, 부족한 돈도 아니다.

노조에 가입된 이들은 우마르 협동조합을 통해 일거리를 찾는다. 이를 통해 마리날레다는 사실상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안달루시아 지역의 실업률이 36%에 이르는 것과 대조된다. 스페인 전체 실업률이 26% 수준이다. 이곳에서는 일자리를 원하면 누구나 협동조합을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일자리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100명이 전일 근무할 노동량에 200명이 지원할 경우 반일 근무로 조정해 모두에게 배분하는 식이다. “많은 돈을 버는 게 우리의 목적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노동의 공간을 만들어줘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지요.” 시에서 노동 자문을 하고 있는 돌로레스(52)가 설명했다.

세네갈에서 온 후세인(28)도 우모소 농장의 노동자다. 그는 사회주의에도, 자본주의에도 관심이 없다. 일자리가 있는 곳이면 족하다. 7년 전 세비야에 온 뒤 그는 노점에서 옷을 팔며 돈을 벌었다. 금융위기가 닥친 뒤 돈벌이가 뚝 끊겼다. 무일푼으로 거리를 전전하는 그에게 스페인 친구가 권했다. “내 고향에 가보는 게 어때? 거긴 늘 일자리가 있거든.” 4년 전 후세인이 연고도 없는 전원마을 마리날레다로 흘러들어온 이유다.

초겨울의 공원에서 노숙하던 ‘불법체류자’ 신분의 후세인에게 마리날레다시는 취업비자 발급을 도와주고 축구경기장의 선수대기실 열쇠를 건넸다. “마리날레다는 이민자들을 보호해주고 또 다른 동력을 주는 장소인 게 분명해요. 비자만 해도, 세비야에 있었다면 절대 해결되지 않았을 거예요.” 100%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다. “농사일도 고되고 미래는 안 보여요.”


대문 왼쪽에 유토피아의 땅이라고 쓰여 있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스페인 내 우파들이 이 작은 마을을 비판할 때 집어드는 논거다. 공산주의적 생활방식 때문에 수십 년째 쳇바퀴만 굴리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마리날레다엔 ‘혁신’의 분위기는 없었다. 투쟁 세대의 자녀들은 세비야로 나가 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닌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도시 생활에 비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날레다의 목표는 경쟁이나 개발이 아니에요. 연대와 통합이죠.” 노동 자문인 돌로레스가 말했다. 자본주의적 ‘성장’ 담론을 거부하면서도 그에 익숙해진 나에게, 마리날레다는 ‘다른 일상’뿐 아니라 ‘다른 가치’까지 보라고 자꾸 묻고 있었다.

게다가 마리날레다의 인구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후세인을 포함해 20여 명의 이주민 이웃도 생겼다. 그 속도는 느리지만 1950~70년대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고향을 등졌던 것을 고려하면 변화임이 분명하다. 적은 임금, 고된 노동에도 마리날레다 주민들의 얼굴이 밝은 이유가 있다. 마리날레다엔 잔디구장·스포츠센터·노인복지관·문화센터를 포함해, 월 이용료가 2만원도 되지 않는 아동보육시설·수영장·공원 등 도시가 가질 수 있는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마리날레다 주민들은 빚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을 통틀어 인생을 저당 잡힐 만큼 큰돈을 빌릴 일이 없다. 스페인 정부가 무상의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의료비로 재산을 탕진할 일이 없는데다, 빚내어 집을 살 일도 없는 까닭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간교한 덫은 ‘빚’이다. 대출을 뜻하는 모기지(Mortgage)가 그 안에 이미 죽음(Mort)을 내장하고 있듯, 빚은 경제적 죽음인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본주의는 그같은 죽음을 비용 없는 상품처럼 손쉽게 권한다. 그 덫을 피할 수 있다면, 자신들의 마을을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마리날레다에서는 월 15유로(약 2만1천원)의 비용만으로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자녀에게 상속도 가능하다. 사실상 무상주거나 마찬가지다. 경제위기 이후 안달루시아 지역에서만 주택담보대출 때문에 69만 가구가 강제 퇴거당한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놀라운 프로그램이다.


마리날레다 주민들이 사는 공동 주택

2년 이상 마리날레다에 거주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주택조합을 만들고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마리날레다의 주요 결정은 모두 주민회의를 통한다. ‘직접민주주의’ 원칙이다. 특히 노동에 참여하거나 주거 지원을 받으려면 주민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월평균 세 차례 열리는 이 회의에서 후안 마누엘 산체스 고르디요 시장은 직접 의제를 설명한다. 누구나 참석하고 발언할 수 있지만 16살 이상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늘 300~400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주민들은 시장마저 탄핵할 수 있다.

건축 허가가 떨어지면 시는 땅을 제공하고 건축가의 임금을 내준다. 자재비는 안달루시아 정부가 지원한다. 이렇게 지은 주택이 지금까지 350채가 넘고, 마을 한쪽에선 늘 공사가 진행 중이다.

건축회사를 운영하는 호세 안토니오(41)도 8년 전 조합을 구성해 집을 지었다. 주택당 가용면적은 190㎡ 수준이다. ‘무상(에 가까운)주거’에 대해 갖는 편견을, 마리날레다는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사장이라곤 해도, 동생과 둘이 집을 개축하는 일을 하니, 호세는 스스로 고용주이자 노동자다. 방 3개와 응접실 2개가 달린 호세의 2층짜리 집에선 나름의 취향이 읽혔다. 14살 딸과 7살 아들의 방을 세심하게 가꾼 손길에서, 곤궁의 흔적은 느낄 수 없었다. “조합에서는 얼개만 함께 지을 뿐이에요. 집 구조를 어떻게 디자인할지는 개인의 자유지요.” 사업 허가만 받는다면, 집을 개조해 가게를 내는 것마저 자유다. 막대한 건축비와 이자, 조합 운영비까지 분담하고도 자로 찍어낸 듯한 성냥갑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호세도 다른 이들처럼 매달 15유로를 정부에 내고 있다. 이전까지 그는 50유로를 내고 지금 집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집에 세들어 살았다. “주거정책이 도입되기 전엔 많은 이들이 가족끼리 한집에 모여 살았습니다. 돈이 없으니 독립을 할 수 없었죠.” 그의 삶은 한결 나아졌을까. “무초!”(무척요) 호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기본적 삶의 필요성이 해결됐습니다. 다른 곳들에 비해 좋은 길을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BMW나 아우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어요. 매일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과 걱정 없이 식사하는 삶, 투쟁은 힘겨운 것이고 우린 견뎠어요. 그 결과를 당신이 보고 있는 거죠. 이해하겠어요?” -안토니오


마을 골목에 그려진 벽화에도 유토피아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겨본 적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1%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99%가 승리했다거나,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을 상대로 통쾌한 반전을 이뤘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언제인가. 마리날레다에는 그런 반전과 쾌감이 있다. 자신들의 투쟁을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BMW나 아우디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어요. 매일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과 걱정 없이 식사하는 삶, 투쟁은 힘겨운 것이고 우린 견뎠어요. 그 결과를 당신이 보고 있는 거죠. 이해하겠어요?”

농부 안토니오의 한마디는 네루다의 시 한 줄 이상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자신의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만난 적이 있는 사람, 그리하여 희망을 움켜쥐는 법을 아는 사람의 말이 가진 진정성 때문이었다. 마리날레다에서 유토피아는 평범한 꿈을 이루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언제 한번 그런 평범한 꿈을 당연하다는 듯 꿔본 적이 있을까. 그리하여 유토피아는, 아직 멀다.

더 보기: 마리날레다 협동조합 주택조합 주민회의 안달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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