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의 동 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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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 이 소설의 주인공. 라 만차 지방의 귀족. 기사도 소설을 탐독한 뒤 스스로 기사라 일컬으며 무술 편력의 길에 나선다.

산초 : 돈 키호테와 같은 마을에 사는 고지식한 농부로서 돈 키호테가 섬의 영주를 시켜 준다는 말에 돈 키호테의 충직한 종자가 된다.

둘시네아 : 델 토보소 마을에 사는 농부의 딸. 돈키호테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애인.

페로 페레스 신부 : 돈 키호테의 친구로서 돈 키호테를 정신 이상에서 구하려고 애쓴다.

니콜라스 : 라 만차 마을의 이발사. 역시 돈 키호테의 친구.

카르데니오 : 안달루시아의 젊은 기사. 주인이자 친구였던 돈 페르난도의 배신으로 약혼자를 잃고 미쳐 버린다.

루스신다 : 카르데니오의 약혼녀.

돈 페르난도 : 안달루시아의 리카르도 공작의 아들. 방탕아로 많은 여자를 울린다.

도로테아 : 돈 페르난도에게 버림받았던 여자. 신부와 이발사를 도와 돈키호테를 구하는 재치 있는 여자.

내용

돈 키호테는 에스파냐의 라 만차 지방에서 한 시골 귀족이 가정부, 조카, 하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기사 이야기를 탐독하다가 이성을 잃고, 스스로 방랑의 기사가 되어 모험길에 나서서, 천하의 사악한 것을 쳐부수어 공을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자기 말에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붙이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낡은 갑옷을 입었다. 기사의 신분에 어울리는 귀부인으로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은 멋대로 붙인 농가집 딸을 마음속으로 정하였다.



집을 나선 돈 키호테는 다 저녁때에 어떤 여인숙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을 성으로 잘못 알고 여인숙 주인을 성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옆방의 매춘부를 공주로 대접하기도 한다. 밤중에 기사 서임식을 열고 있던 돈 키호테는 물 길러 온 마부와 시비가 붙어 큰 소동이 일어났으나 주인의 주선으로 수습되고, 새벽에 여인숙을 나온 돈 키호테는 상인들과 시비가 벌어져 혼이 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두 번째 여행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이웃에 사는 농민 산초 판사를 설득하여 종자로 삼았는데, 섬을 하나 점령하여 그 곳 태수로 임명해 주겠다는 돈 키호테의 말을 곧이듣고 처자식을 버려 둔 채 따라 나선다.

그들이 들판에 내려서자 커다란 풍차가 여러 개 있었다. 돈 키호테는 이것들이 거인의 무리들이라고 판단하여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하였다. 산초 판사가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 와 돈 키호테는 말과 함께 풍차에 말려 들어가 건너편으로 내동댕이쳐진다.

피스카이아인과의 1대 1 결투, 양치기 오두막의 환대 등을 거쳐 수없이 우스운 짓을 당하지만, 본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를 찾아 나선 마을 사람들 꾀에 넘어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건강을 되찾게 되자 다시 모험길에 나서게 된다.


3차 여행에도 산초 판사는 동행을 하는데, 이번에도 먼저와 같은 실수와 소동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어느 공작 저택에 초대되어 기사로서의 정중한 대접을 받고 마음이 들떴으나, 공작 부처의 장난이었음을 알고 낙담하게 된다. 돈키호테의 여행도 종말에 가까워지자 꿈은 스러지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을 뜬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시골 신사가 되어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정식표제 : <재기(才氣) 발랄한 향사(鄕士) 돈 키호테 데 라 만차: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

갈래 : 장편 풍자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시점

구성 : 시간적

성격 : 풍자적

배경 : 17세기 스페인

주제 : 돈 키호테의 모험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 에스파냐 알칼라데에나레스 출생. 소설 《돈 키호테 Don Quixote》(1605)의 작가이다.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8년 마드리드에서 로페스 데 오요스의 사숙(私塾)에서 잠시 공부한 것 외에는 학교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다.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아크콰비바 추기경을 섬기고, 이어서 이탈리아 주재 에스파냐 군대에 입대하여 1571년 역사상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가, 가슴에 두 군데, 왼손엔 평생 사용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1575년 에스파냐 해군 총사령관이며 왕제(王弟)인 돈 후안의 표창장을 받고 에스파냐로 귀국하던 도중, 당시 지중해에 횡행하던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1580년까지 5년간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1584년 18 년 연하인 카타리나라는 부유한 농가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에 처녀작 소설 《라 갈라테아 La Galatea》를 출판하였다. 1587년까지 20∼30편의 희곡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알제리의 생활》과 《라 누만시아》 등 2편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 후 문학을 버리고 일개 무명의 세금 수금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몇 번인가 투옥당하기도 하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605년 명작 《돈 키호테》 제1부를 출판하였다. 출판과 함께 세상의 갈채를 받았으나, 여전히 빈궁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출판 직후 어느 변사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받아 한때 가족과 함께 구속된 적도 있었다. 그 후 1615년 《돈 키호테》 제2부를 출판하기까지 12편의 중편을 모은 《모범 소설집 Novelas exemplares》(1613), 동시대의 시인을 평한 장시 《파르나소에의 여행 Viage del Parnaso》(1614) 《신작 희곡 8편 및 막간희극 8편 Ocho comedias, y ocho entremeses nuevos》(1615)을 출판하였다. 만년에는 종교적인 결사에 가담하고, 1611년 프란시스코 데 실바가 창립한 아카데미아 셀바헤라는 작가 단체에 가입하였다. 그는 1616년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날은 W.셰익스피어 사망일과 같다.



《돈 키호테》의 정식명칭은 《재치 발랄한 향사(鄕士)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로, 작가 자신이 “유행하고 있는 기사(騎士)이야기의 인기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에스파냐에서 유행한 기사 이야기의 패러디에서 출발되었다. 이 작품의 중심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두 성격의 창조로, 기사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 판자의 실제적이고 비속한 물질주의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며, 인간성의 양면을 나타낸다. 두 사람의 보편적인 인간성은 국적 ·인종 ·나이 ·성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묘사의 요령을 알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였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쎄르반떼스는 이스파니아 문학의 황금시대에 등장한 대문호로서, 서로 모르고 지냈을 것이나, 당시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이탈리아에는 타소, 프랑스에는 몽테뉴가, 가까운 포르투갈에는 카모잉시 등이 활약하였으나, 유럽 문학에 있어서도 황금시대였음이 틀림없다.



당시 이스파니아에서는 카롤릭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이탈리아에서 불어오는 이른바 휴머니즘이 대량으로 유입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스파니아 문학의 황금시대는 이스파니아 민족의 고유한 카톨릭 전통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훨씬 민중적이며, 다정다감하며, 보다 덜 학구적·철학적이다. 쎄르반떼스는 고전문학의 법칙에 심취한 휴머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인 것이다. 그 역시 피레네 산맥 너머의 고전주의 내지 귀족적 문학에 대하여 들은 바 있었을 것이고 또 상당히 관심을 보여 흉내를 낸 적도 없지 않으나 결국은 그가 타고난 이스파니아 민중문학의 전통을 따랐다.



《동 끼호떼》는 서양 최초의 근대적 소설이며 또한 최대의 소설 중의 하나라는, 아니 최대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작품이 그전의 다른 소설 작품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인물의 묘사와 발전 과정 및 이야기의 역동성, 심리적 진행>이 그 두드러진 차이이다. 복카치오 역시 위대한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그려진 사회적 전형들로서 사건이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그들에게> 발생할 뿐이며, 인물의 성장 발전 과정은 전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이야말로 쎄르반떼스 최초로 소설문학에 도입한 뛰어난 기교이다.



쎄르반떼스는 수십 년간에 걸쳐서 《동 끼호떼》를 쓰면서 그 작중 인물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동시에 모르는 중에 성장했다. 이 역시 근대소설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개발한 것이 되었다. 애초의 그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 <만인을 즐겁게 해 줄> 기막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시작했는지 모르나, 점점 인간 존재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가상과 실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속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동 끼호떼와 산초는 이 문제의 양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 서로서로를 보완하고 서로 서로에 반응하는 모습을 그려나간 솜씨는 만인의 찬탄을 받을 만하다. 그 둘은 점점 서로를 닮아가며 그 둘의 관계는 쎄르반떼스의 정신 속에 은밀히 전개되고 있던 내적 대화의 극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자는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에게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진리를 배우며, 그 배워나가는 과정이 또한 그들을 더욱 실감있게 만드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소설가의 작가적 성장 과정의 모범이 된다.


쎄르반떼스가 《돈키호테》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 작품에 나타나는 세계관, 인생관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 또는 단순한 독자들은 이 작품이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돈키호테》는 확실히 소극적(笑劇的) 요소가 다분히 있다.



약간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이 작품을 중세의 기사도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로 보는 이들도 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랬고 이 견해는 아직도 서양 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다. 바이런 같은 낭만주의자는 기사도 같은 낭만적 제도를 이 작품이 추방해 버린 것을 오히려 개탄했다. 그러나 역사를 좀더 잘 아는 이들에 의하면 편력기사 등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기보다 중세인들의 상상의 산물이었다. 확실히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쎄르반떼스가 기사적인 용맹을 조소했을 리 없다. 그가 조소한 것은 기사도를 주제로 해서 무질서하게 생겨난 우스꽝스런 문학이었다.



다시 말하면 쎄르반떼스의 목적은 사회적, 정치적인 아니라 문학적,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사회개혁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와 왕권에 무척 충성스런 온건한 시민이었다. 그를 새로운 세계를 불러들인 혁명분자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교회와 왕권에 충성했다고 해서 그가 유독 신앙심이 열렬한 카톨릭교도였다거나, 애국열사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단지 전통적 의미의 평민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신학이나 철학의 전문적 학식을 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소설가처럼 인생의 신비에 민감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쎄르반떼스는 현실사회라는 것이 어딘가 정말 진짜가 아니고 가상 내지 환상 같은 데가 있다고 믿은 듯하다. 적어도 절대적 이상에 비추어볼 때 상대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사회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는 외적인 현상을 고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돈키호테가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집념에 사로잡힌 반동적 보수주의자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 그보다는 사람에게 정의를 실현한다고 함부로 남의 일에 뛰어들어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해를 가져오는 자기 중심적 유토피아주의자로 볼 수도 있다. 돈키호테가 농부의 머슴인 안드레스를 구해준다고 간섭한 까닭에 안드레스가 더 불행하게 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확실히 희극적이기보다는 풍자적이다.



돈키호테의 광증은 이 작품의 중심 문제이다. 확실히 그의 광증은 평범한 의미의 실성·정신착란·정신이상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통 실성한 사람을 비웃는 것은 인륜상 용납되지 않으나 돈키호테의 특수한 광태에 대해서는 마음놓고 웃을 수 있다. 돈키호테는 광인이 아니라 집념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자기의 환상의 성격을 잘 안다. 사실 그는 환상을 보는 게 아니라(그랬다면 정말 평범한 광인에 불과하다) 자기가 보는 것을 환상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집념, 다시 말하면 특별한 신념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병자가 아니라 상상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적 철인이다. 자기가 상상한 것을 믿을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시인이 주장하는 권리이다. 위에서 우리는 돈키호테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여기서 다시 그가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도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시적 철학의 대상이 될 뿐이다.



더욱이 제2편에 들어오면 돈키호테의 형이상학적 의미의 밀도가 짙어짐을 아니 느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 또는 실체란 무엇인가? 사물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자기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킬 진리를 스스로 창안해 낼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인가? 등등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실체와 가상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인생의 비극과 관련된 문제이다. 현대의 많은 평론가에 의하면, 근대소설은 바로 이 문제를 근본문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돈키호테》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도 근대 사실주의 소설의 아버지가 된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의 세계가 정말 실현된 듯이 행동하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관념이 현실인 듯이 행동한다. 그는 둘씨네아 아가씨에 대해서 환상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둘씨네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 아니다. 나는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 누구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실존철학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로운 실존이 사물의 사실성에 앞선다는 생각 말이다. 중세의 기사도 문학에 대한 공격은 단지 소설의 한 모티브일 뿐이고 이 작품의 진정한 의도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명제에 대한 탐구이다.



돈키호테와 산초 빤싸는 이 심각한 문제를 가운데 놓고 계속적으로 대화를 통해 탐구해 들어간다. 산초는 단지 상식적 인간의 전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근본에 있어서는 돈키호테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여 있다. 실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주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제41장에 끌라빌레뇨라는 천마의 모험이 나온다. 산초는 이 모험에서 광명한 천상의 경험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돌아오자 온갖 허황스런 체험담을 늘어놓는데 그 자신이 그것을 믿는지 안 믿는지 확실치 않다. 즉 현실과 상상의 차이가 무시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제23장에서 돈키호테는 몬떼시노스의 동굴 속을 탐험하고 나서 허황된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결국 주인과 하인이 꼭 같은 체험에 대하여 꼭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돈키호테는 경험담을 말한 산초에게 "산초, 자네가 하늘에서 본 것을 나에게 믿게 하려면, 내가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본 것을 자네가 믿으면 되네."라고 말한다. 둘은 꼭같은 철학적 입장에 처해 있어 동지가 된 것이다.



몬떼시노스와 끌라빌레뇨 모험은 두 사람의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믿으려 하는 그들의 의지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상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종잡을 수 없이 뒤얽히고 만다. 그들 자신들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제25장에서 <예언하는 원숭이>는 몬떼시노스의 환상이 정말이냐고 산초가 묻자 그것은 정말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하다고 대답한다. 제62장에서도 마술에 걸린 두상은 몬떼시노스의 모험이 진실이냐 꿈이냐고 돈키호테가 묻자 역시 진실과 꿈이 다 얼마씩 섞여 있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진실이고 저것은 꿈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하는 자는 실상 우스운 자라는 진리를 쎄르반떼스는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돈키호테는 그저 우스꽝스럽기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상상의 자유를 믿는 용사이기도 하다.



흔히들 돈키호테적 인간과 햄릿적 인간을 대립시켜, 전자를 생각 없이 행동만 하는 타입으로, 후자를 행동없이 생각만 하는 타입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후편의 돈키호테의 철학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생각지 않은 얄팍한 상식론에 불과하다.



《돈키호테》의 최후는 확실히 구슬프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이상 추구의 용사의 말로가 보잘것없는 시골 홀아비 지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비애감을 준다. 인생이란 그래서 비극이란 말인가? 그러나 한편 그 임종의 장면은 자아의 정화가 성취되는 승리의 순간으로도 볼 수 있다. "집에 계셔서 재산을 돌보시며 자주 고해성사를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세요."하고 가정부가 그에게 충고한다. 이 평범한 충고는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할 것이지만 환상과 가상으로 가득한 우주의 신비를 탐색하고 돌아온 피곤한 이상주의자에게는 귀중한 충고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긴 여행은 고향의 아름다움을 새로이 발견하게 해 줄 때 가장 의의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도 일단 그것으로부터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을 진리로 알아보게 된다. 쎄르반떼스는 이상만을 추구하라고 설교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현실만이 좋은 것이란 주장도 하지 않는다. 둘은 다 긍정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현실은 이상세계에의 모험을 통하여 새롭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인생은 그저 비극도, 그저 희극도 아니며, 아마도 희비극일 것이다.

(이상섭)







모험소설

모험과 난관을 무릅쓰는 행동과 사건들이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소설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확대되면 신념과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서, 뜻있는 삶의 목표를 발견하거나 추구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모든 인간의 행동도 모험이라고 볼 수 있다. 세르반테스, 브론테, 도스토예프스키, 카뮈, 카프카 등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도 행동과 사건을 주도하는 예외없는 모험가라 할 수 있다. 즉, 모험 소설이란 영원히 해소되기 어려워 보이는 갈등-현실과 이상, 이성과 감성, 본질과 비본질 사이에 화해와 조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야심에 찬 문학적 의도가 담긴 이야기 현상이라고 포괄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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