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명 정리 3부

mimicha 0 1,989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 제 1 기 <711~1031> 바그다드에서 도망쳐 온 우마이야 왕조의 압데라만이 알 안달루스의 에미르로 선언, 군사적 통치의 시작. 755~929년에 걸쳐 이스파노 우마이야국 건설. 압데라만 2세 <822~852>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랍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수립, 바그다드 체제를 모방하여 코르도바에 조정을 설치했다. 압데라만 3세는 당시까지 바그다드의 칼리화토와 연합한 코르도바 에미라토의 유약한 관계를 청산하고 코르도바의 칼리화토 우마이야 왕조를 창설했다. 당시 코르도바는 서부 지중해 지역 최대의 도시로,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찬연히 빛나는 문화의 대 중심지로 발전하여 다마스커스와 바그다드의 경쟁적인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인구 10만 명이 넘어. 더우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기독교의 성지>를 점령<997>하고 대성당을 파괴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으나, 이는 이슬람권내의 기독교인들과 북쪽의 잔여 기독교왕국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내의 기독교 왕국 정복은 차츰 점령의 의미보다는 응징의 성격으로 변해갔고 이는 통치상의 많은 문제들을 수반했다. 이에 필연적으로 이슬람은 계속 군사적 통치가 필요했고 이로 인해 징집과 부대의 유지라는 점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고, 더우기 내분까지 일기 시작해 코르도바 왕국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슬람 영역 내에서 소위 타이화 왕국들로 분열되었다. 이는 강력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교 세력의 약화를 의미했고, 기도교인들에게 국토회복운동의 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 제 2 기 <1031~1238> 초기에 타이화 왕국들은 25개 였으나, 그 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양했고, 부와 세력도 각각 달랐다. 그러나 종국에는 사라고사, 톨레도, 바다호스, 세비야 그리고 그라나다의 타이화 왕국들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이룩하여 일부는 예술과 문화도 새롭게 부상했으나, 대체로 정치조직은 취약성을 보여 국가 질서는 용병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1085년의 기독교인들의 톨레도 정복은 이슬람 왕국들에게 경제적 위기와 내정의 혼란을 가져왔다. 이는 결국 알모라비데 족<북아프리카의 이스람국>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알모라비데 인들의 반도 상륙은 모든 타이화 왕국들이 하나로 뭉치는 이슬람 교도의 이베리아 정치적 재통합을 의미하게 되었다 <알무라비트조 1090~1145>. 그와 같은 군사정복은 약 50년이 걸렸다. 이 때 이스파노 이슬람 교도<이슬람으로 개종한 원주민들>들의 반란으로 다시 제 2차 타이화 왕국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자, 1170년에 알모아데 족<또 다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국>1 이 건너와 알모라비데와 타이화 왕국들을 다시 정치적 통합을시도했다<알무와히드조>. 그러나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에서 기독교도들이 알모아데 족을 격파함으로써 반도에 세 번째 타이화 왕국들의 출현을 가져왔다. 결국 이 왕국들은 1492년까지 지속된 그라나다 왕국을 제외하고는 국토 회복 과정에서 서서히 카톨릭 왕국들에게 통합되어 사라져갔다.

노예 - 알함브라 궁전을 지을 때 단 한 명의 노예도 동원되지 않아... 전부 장인들의 솜씨. 그렇다면 노예는 어디에? 초창기에는 노예를 보호하는 하등의법적 장치가 없었고 완전히 주인의 처분에 맡겨져따. 그러나 차츰, 주인이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갖기는 했지만, 친절하게 대해주고 가능하다면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스스로 금전으로써 자유를 되살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권장하였다. 노예가 법적으로 열등한 것은 사실이나, 만약 그가 무슬림이라면 자유인과 하나의 형제로서 종교적으로 동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초대 칼리프들은 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을 억제하였고 율법학자들은 그러한 행위를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노예가 개종하여 무슬림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변재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노예화하는 것도, 또 자신이나 아이들을 노예로 파는 것도 금지되었다. 율법학자들은 인간의 자연상태는 자유이고, 노예는 노예 어머니에서 태어난 자나 전쟁에서 붙잡힌 이교도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주인은 노예를 과도하게 부릴수도 없었다. 노예는 주인의 허락을 받고 혼인할수 있으며, 법적으로는 자유민인 자유민인 여자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주인이 노예여자와 혼인하길 원한다면 그녀를 해방시켜야만 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노예는 남자들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으나, 남자노예를 소유한 여자주인은 그를 마음대로 하도록 혀용되지 않았다. 많은 수의 여자노예들이 하렘으로 들어와 첩이 되거나 집안의 허드렛일을 맡아 보았다. 노예들은 주로 가내적 혹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술탄들이 구입한 젊은 노예들은 카이로에 있는 특수 학교에서 철저한 이슬람식 교육과 군사훈련을 받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뒤에는 술탄의 친위대에 편입되었다가 해방되면서 말과 토지를 부여받았다. 우리가 마믈룩과 오스만에서 보이는 유사한 제도에 대하여 노예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마믈룩조에서는 노예야 말로 최고의 특권을 향유하였고 술탄의 자리를 꿈꿀 수 있었다. 반면 자유 신분인 그들의 자식들--- 심지어 술탄 자신의 자식들도 포함해서--- 은 자유민 대중 속의 일원이자 이등군대로 격하되어 봉급이나 장비면에서 심각한 차별을 감수하였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에서도 최고의 지위인 술탄은 20세기 초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창건자 오스만의 후예들에게 계승되었지만, 민정과 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재상직은 적어도 18세기까지 노예들이 장악하였다. 재상을 역임한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이탈리아,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등 다양한 민족들이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렘 - 궁전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란 뜻과 함께 궁전내의 모든 여인들을 지칭하는 말, 그리고 그녀들이 갇혀 살고 있는 방을 의미한다. 15세기 오스만의 토프카프 궁에선 서너 명이 한 방을 썼고 각 방마다 스무 명의 내시들이 시중을 들었다. 왕이 죽으면 왕의 어머니와 여자 형제, 후궁들과 노예들은 옛 궁전으로 밀려났다. 새로운 술탄은 이곳을 자신과 그에게 속한 여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1603년 오스만 투르크 궁전의 하렘에는 266명의 여자 노예들이 수용되었다. 하렘에 들어가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처녀 노예들만이 선발과정을 거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술탄에게 선물로 바쳐지거나 전리품으로 잡혀온 여자들도 있었고, 노예시장에서 팔려온 여자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시종과 비슷한 과정의 교육을 받았다. 우선 이슬람의 규칙들을 배운 다음 온갖 기예를 쌓아야 했는데, 이러한 과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녀들을 완벽한 여자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모든 노예여자들이 왕에게 속해 있던 것은 아니다. 그중 일부는 일단 교육이 끝나면 지참금을 받아 시종출신의 고위인사와 결혼했다. 초기 술탄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외국의 공주들과 결혼했다. 그리고는 하렘에서 후궁들을 간택했다. 술탄이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관심에 따라 여자 노예들의 서열도 올라갔다. 이렇게 해서 카스 오달리스크의 서열에 오르면 왕으로부터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네 명의 후궁인 카딤 중에 한 명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카딤 중에서도 처음으로 아들을 낳는 여자는 바크 카딤이라는 서열에 올라 다른 후궁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하렘 전체의 최고 권력은 술탄의 어머니인 술탄 발리데에게 돌아갔다. 바크 카딤이 있는 경우라도 술탄 발리데는 그녀보다 높은 지위에서 하렘 전체를 통솔했다. 그렇기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술탄의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 무자비한 싸움을 벌였던가. 하렘의 우두머리 내시인 키즐라르 아가지의 환심을 사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스만조에서는 하렘의 내시들은 모두 흑인이었다.>. 이는 그가 후궁들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밀폐된 상태에서 지속되는 호사는 질투와 음모를 낳았고, 이는 또한 암살로 연결이 되었으며, 후궁들의 각자의 아들들을 통한 하렘의 국정개입은 결국 국가의 쇠퇴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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