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데 팔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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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데 팔랴

음악사적으로 볼 때 단 한 사람의 작곡가의 비중이 한 악파의 가치를 결정짓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근대 스페인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악파로서는 마누엘 데 팔랴야 말로 참으로 그러나 비중을 갖는 작곡가였다. 그에 앞선 알베니스나 그라나도스도 훌륭한 천분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보아 온 바와 같이 그들의 재능은 대개 피아노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펼쳐졌다. 나는 그라나도스의 경우에는 성악곡에도 제 1급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지만 그 경우에도 반주의 피아노가 미묘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양자 모두 피아노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거기서 멀어지면 물없는 고기가 되어 버리는 것을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알고 있었다. 또한 이 두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참다운 어법을 찾아낸 것이 너무 늦었었다. 다같이 48세에 세상을 떠난 이들 두 사람이 아쉬운대로 10년의 수명만 더 주어졌더라면 스페인의 근대 악파는 훨씬 일찍 더욱 충실해졌을 것이다.

팔랴도 역시 그가 존경했던 두 사람의 선배와 같이 음악가를 향한 첫걸음을 피아노로 시작했다. 적어도 30세 까지의 그는 유망한 작곡가인 동시에 스페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천성이라고 밖에 할 수 없겠지만, 팔랴에게는 동시에 관현악법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있었다. 또한 화성법에 관해서도 팔랴의 감각은 한층 새롭고 독창성에 차 있으며 논리적이었다. 팔랴는 알베니스보다 16세, 그리나다소보다는 9세밖에 젊지 않지만 다가오는 새 시대의 입김을 예민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것을 작품에 살리려고 하는 태도에 있어서 분명히 선배 두사람과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요절한데 반해서 그는 70년의 생애를 보낸 것도 물론 그의 '현대성'에 관련이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만이 아니다. 스스로의 일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세상의 갈채를 앞에 놓고서도 결코 자신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줄곧 '지금 꼭 해야 할 일'만을 탐구해 간 팔랴의 삶은 한 사람의 희귀한 '음악의 구도자'를 생각케 한다.

마누엘 데 팔랴는 1876년 11월 23일 스페인의 남단에 가까운 항구 카디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발렌시아(동스페인) 출신의 상인, 모친은 카탈로니아 출신으로 꽤 능숙한 피아노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시절의 팔랴는 유럽의 서쪽에 위치한 활달한 분위기의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치고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 외에도 이웃에는 이를테면 '생상스의 친구'였던 아마튜어 첼리스트 등도 살고 있어서 마누엘에게 여러가지로 음악의 초보를 가르쳐 주었다. 10대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비니에그라 집안--그 것이 예의 첼리스트의 성이었다---의 살롱에서 연주하기 위한 실내악곡을 몇 곡인가 만들었다.마누엘은 꿈을 좋아하는 소년이어서 여간 흥이 나지않는 한 통 말이 없었다. 9세 때, 그는 어머니와 함께 하이든의 명작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말씀>의 연주에 가담했다. 피아노용으로 편곡된 파트를 연탄한 것이다. 이 오라토리오 (관현악용, 현악 4중주용 판도 전해지고 있다)는 하이든이 카디스 교회의 의뢰를 받고 보낸 것으로 성주간중의 수난의 금요일에 이 것을 연주하는 습관은 지금까지도 카디스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 깊고 경건한 기도음악이 팔랴의 첫걸음에 울렸다는 사실은 무언가 상징적이다.

10대 후반부터 팔랴는 우수한 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수도 마드리드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드디어 그가 20세 때 온 가족이 마드리드로 살림을 모두 옮겨 살게 된다. 피아노의 스승은 마드리드 음악원의 명교수로 알려진 호세 트라고 (1856-1934)였다. 마드리드에 정주한 후 팔랴는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 과정을 눈부신 속도로 끝마쳤다. 그 동안 작곡 교수 펠리페 페드렐에게서 배운 것이 젊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미 알베니스나 그라나도스의 항에서도 페드렐의 가르침을 소개했지만 평생동안 스승을 경애한 사람은 특히 팔랴이다. '페드렐은 가장 훌륭한 마에스트로 였다'라고 팔랴는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20대의 팔랴는 시대의 젊은이답게 가벼운 사르수엘라--스페인식의 오페라 혹은 오페레타--의 작곡에 손을 대기도 했고--오늘날 악보로 남아 있는 가작 중에는 <라 이네스의 사랑>(1902년 마드리드에서 상연)이 있다--<녹턴>,<왈츠 카프리쵸>와 같은 피아노용 살롱풍 소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거기에서도 팔랴의 서정적인 재질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팔랴가 소질이 많은 음악가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1905년 27세의 봄이다. 우선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이 주최한 신작 오페라 콩쿠르에서 그는 <덧없는 인생>을 출품하여 무난하게 1등상을 받았다. 또 하나의 영예는 놀랍게도 오페라 제출 마감날로부터 겨우 하루 뒤에 열린 같은 음악원의 피아노 콘테스트이다. 전날까지의 악보쓰기에 팔랴의 손가락은 굳어져 있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 느낌이였으나 여기서도 팔랴는 우승했다. 이 때 그와 경합하여 2위가 된 사람이 그라나도스의 수제자 프랑크 마샬로, 두 사람은 그 후부터 오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팔랴는 마드리드의 음악 환경에 만족할 수 없었다. '당선된 작품은즉각 수도의 주요 극장에서 상연한다'는 모집 당시의 캐치프레이즈와는 달리 <덧없는 인생>도 전혀 햇빛을 보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파리행을 꿈꾸게 된다. 한 가지 자극은 당시 스페인에서 알베니스의 '최신작'<이베리아>를 많이 연주하고 있던 호아킨 말라츠(1872-1912, 타레가의 의해 편곡된'스페인 세레나데'만 유명...^^;)의 연주회에서 였다. 귀에 익은 스페인의 모티브에서 이렇게 청신한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팔랴에게 있어 적지 않은 계시였다.

1907년 초여름, 팔랴는 드디어 찬스를 얻어 파리의 땅을 밟게 되었다. 평소 조용한 성품이었던 팔랴도 일단 결심하면 한결같이 열중하는 정열과 행동력을 갖고 있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깡마른 단신(短身)의 이 안달루싱 출신의 신출나기는 파리 악단의 대가들을 직접 찾아가려고 결심한 것이다. 우선 드뷔시를 만나보려고 했으나 부재 중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한채 만나게 된 상대는 <마법사의 제자>의 작곡가 폴 뒤카(1865-1935)였다.갑작스런 방문에 당혹한 표정의 뒤카는 팔랴가 갖고 온 <덧없는 인생>의 스코어를 피아노로 치자 점차 열중하여 감탄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팔랴가 사양하며 그만 치려고 하자 뒤카는 계속 치도록 재촉하여 끝내 전곡을 다 치게 하였다. 그리고 끝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곡을 오페라 코미크좌에서 상연하고 싶군...."

팔랴는 꿈인가 하고 놀라 그 분야의 대가인 뒤카에게 관현악법과 화성법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여 승낙을 받았다. 뒤카는 또 그의 친구인 알베니스를 팔랴에게 소개해 주었다. 알베니스는 젊은 동국인을 마음으로부터 대접하고 뒤카와 마찬가지로 <덧없는 인생>을 들었을 뿐 아니라 출판된 지 얼마 안되는 <이베리아>의 제 1권을 증정해 주었다. 이미 만년을 맞이하고 있던 알베니스는 겨우 2년후에 타계하고 말았지만 팔랴는 그 전에 몇 번이고 이 선배를 찾아가서 '세계적인 시야를 가진 스페인 음악의 확립'(이 것은 알베니스의 입버릇이었다)을 위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파리에 간 후 처음으로 완성하여 다행히도 출판하게 된 피아노곡 '4개의 스페인 풍의 소품'을 팔랴는 알베니스에게 헌정했다.

드뷔시와 팔랴의 만남은 또 재미있다. 처음으로 인상주의의 대가와 만날 수 있었을때 팔랴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그 때까지 초상으로 보아 왔던 수염에 싸인 창백한 얼굴과는 달리 마치 뱃사람같이 굳세고 살찐 불그스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팔랴가 주저하는 것을 보자 드뷔시는 여느때나 다름없이 야유섞인 말투로 말했다. " 나요, 본인이요. " 얼떨떨한 팔랴는 그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쭉 프랑스 음악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드뷔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난 그게 아주 싫단 말이야...." 그러나 이미 뒤카로부터 '까무잡잡한 스페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드뷔시는 팔랴에게 오페라를 쳐보라고 재촉하고 일단 귀를 기울이고선 역시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스페인이라고 하는 풍토 그 자체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드뷔시는 그 다음부터 팔랴에게 무뚝뚝한 것 같지만 마음이 담긴 적절한 조언을 주었다. 1918 년, 드뷔시가 56세로 일찍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스페인으로 돌아와 있던 팔랴는 한편의 아름답고 침통한 <통보=추도곡>-- '옴메니게' 드뷔시 무덤에 바치는 찬가--를, '표정이 풍부한 클라브생(하프시코드)'이라 하여 고인이 애호하던 악기인 기타를 위한 곡을 작곡하여 헌정하였다.

팔랴가 파리에서 사귄 음악가들 중에는 포레, 라벨, 스트라빈스키도 있다.스페인 출신의 탁월한 피아니스트이며 프랑스 근대 음악의 연주에서도 특출한 대가라는 말을 듣고 있던 리카르도 비녜스(1875-1943)나 역시 같은 나라 출신인 재능 많은 작곡가 호아킨 투리나도 중요한 친구였다.

이러한 환경을 얻은 파리 유학시절(1907-1914)은 팔랴에게 있어서 무한히 가치 있는 나날이었다. 그 자신도 "만일 파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후일의 나는 있지 못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 기간에 발표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스페인에 돌아가서 발표한 명작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인상' <스페인 정원의 밤>(1915년),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집 <7개의 스페인 민요>(1914년)는 모두 파리 시절에 착상하여 스케치를 마무리 한 것이었다. 그 중 <스페인 정원의 밤>은 팔랴의 전 작품 중에서도 시적 정서의 향기로움으로 청중을 매료시키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인 남스페인의, 동방 전설의 잔향도 섞인 신비한 밤의 기분을 이 '교향적인상'은 여실히 반영해 주고 있다.이 것이 파리에서 착상되어 마드리드에서완성되었다고 하는 것도 상징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근대 프랑스의 고아한 에스프리, 세련된 기법을 팔랴가 독자적인 감각을 통해서 흡수하고 스페인의 토양에 훌륭하게 이식하여 피게 한 꽃이 이 작품이니까.설혹 인상파의 옷을 입었다 치더라도 이 곡의 숨결은 틀림없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의 혼이다. 한편 후자는 이베리아의 각지에서 개성이 풍부한 민요의 선율을 모아 마치 그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그림자나 마음을 찾아내듯이 적확한 필치로 독창적인 화성을 붙인(피아노 반주) 가곡집이며 이제 스페인 가곡의 고전으로 불후의 가치에 빛나고 있다.

오페라 <덧없는 인생>은 드디어 1913년에 남 프랑스의 니스에서 대망의 초연을 맞이했으나 이듬해인 1914년,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의 폭풍을 피하기 위해 아쉬움을 금하지 못한 채 팔랴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스페인은 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방관했기 때문에 팔랴는 파리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안부를 걱정하면서도, 그리고 1916년에 일어난 그라나도스의 뜻밖의 사고사를 슬퍼하면서도--팔랴는 몇 번인가 이 선배가 연주하는 피아노에 감동한 일이 있으며 또 <고예스카스>에 감동하고 있었다.--작곡에 열중할 수가 없었다. 샘솟듯 흘러넘치는 창작 의욕의 결정은 주로 두개의 발레곡 <사랑은 마술사>(1915년), <삼각모자>(1919년) 속에서 볼 수 있다. <사랑은 마술사>는 당시의 마드리드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던 그레고리오 마르티네스 세라와 스페인 무용의 명화(名花) 파스토라 인페리오의 의뢰로 작곡된 것이다. 파스토라는 스페인에 정주하는 집시의 명문 출신으로 그녀의 일족은 다같이 플라멩코의 뛰어난 예술가들이었다. 작곡에 즈음하여 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던 팔랴는 전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던 플라멩코와 한층 더 친숙해질 수 있었다. 아름다운 미망인의 사랑, 그 것을 질투하여 저 세상에서 나오는 남편의 유령....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이 발레곡에는 안달루시아 특유의 격렬한 애환의 표출, 활기와 신비성의 불가사의한 융합이 특출하다. 강렬한 토속성과 치밀하고 세련된 기법을 훌륭하게 양립시킨 이 작품에 의해서 스페인은 처음으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관현악곡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각모자>는 페드로 A. 알라르콘의 민화에 의한 소설을 각색한 발레인데 호색가인 시장이 물레방앗간의 미인 아내를 짝사랑하는 데서 벌어지는 움직임이 많은 희극조의 줄거리이다. 이 발레곡은 역시 무대를 안달루시아로 상정하고 있는데 <사랑은 마술사>에 넘치는 어두운 밤의 분위기--잘 알려진 <진화제의 춤>, <도깨비불의 춤>--에 비해서 여기에는 쾌활하고 밝은 빛이 넘치고 있으며, 그렇다고는 해도 작품중에는 밤의 정경도 설정되어 있으며, 음악에도 자주 팔랴의 본질로 여겨지는 조용한 애수나 신비감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삼각모자>의 초연은 의뢰자인 디아길레프와 러시아 발레단에 의해 런던에서 행해졌다. 안무 및 주연이 레오니드 마신, 무대장치 및 의상은 파블로 피카소, 지휘자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진용이다. 초연은 대 성공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바다를 건너서 팔랴에게 날아온 것은 '모친 위독'이라는 전보였다. 급히 알함브라 극장--런던에 알함브라 극장???----을 나온 팔랴를 발레의 출연자 전원이 무대 의상 차림 위에 코트를 걸친채 역까지 전송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다.

<삼각모자>가 완성되었을 무렵 팔랴는 43세의 장년기 였는데 관현악 이외의 장르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썼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의뢰로 피아노곡 <안달루시아 환상곡(판타시아베티카)>(1919년)은 약간은 소박한 탓인지별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긴밀하고 무게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멩코의 기타와 노래의 취향이 일종의 독특한 소나타풍 형식속에 훌륭한 근대 음악으로 빛어지고 있다.

1919년에 처음으로 동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를 방문한 팔랴는 만년설을 뒤집어 쓰고 있는 산맥의 기슭에 자리잡은 고도(古都)의 분위기가 유난히 마음에 들어 , 다음 1920년 부터 마드리드를 떠나 여기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고독과 사색을 사랑했던 팔랴에게는 명성이 갑자기 높아짐에 따라 신변의 번거로움도 늘어난 수도(首都)의 생활이 쾌적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라나다 근교의 산장에 주거를 정한 다음, 팔랴는 20년 가까이 그 곳에서살게 된다. 원래가 결코 건강한 편이 아닌 팔랴가 기후가 좋은 그라나다로 옮긴 것은 건강을 위한 뜻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으로 옮겨온 지 얼마 후 팔랴는 막 20세를 갓 넘은 가르시아 로르카-주: 20세기 스페인의 탁월한 시인, 극작가이며 음악가.<피의 혼례>,<엘마>,<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마리아나 피네다>.... 스페인 내전에 희생됨---와 알게 되었다. 1922년에 팔랴는 로르카, 유명한 화가 이그나시오 슬로아가, 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스 세고비아등과 의논하여 그라나다 시에서 <칸테 혼도 콩쿠르>를 개최했다. 19세기에 황금 시대를 자랑했던 카페 혼도, 플라멩코의 핵심을 이루는 '속깊은 노래'가 그 귀중한 음악성에도 쇠미해 가는 것을 팔랴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안달루시아의 민중이 전해 온 보물을 어떻게 해서든 구하고자 스스로 콩쿠르 형식의 페스티발을 제창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콩쿠르를 열 무렵부터 팔랴의 작품은 종래의 뚜렷하던 민족적인 경향, 특히 안달루시아의 지방색을 농후하게 나타낸 경향에서 멀어져 갔다. <덧없는 인생>에서 <스페인 정원의 밤>, <사랑은 마술사>를 거쳐 <삼각모자>까지 현재도 팔랴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여러 작품에는 말하자면 거대하고 다채로운 기타와 같은 생기에 넘치는 리듬, 풍미에 넘치는 잔가락이 섞인 멜로디, 독특하고 신비로운 카덴츠(화성진행)에서 오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맥박치고 있다. 그러한 테마는 대개의 경우, 소재로서의 민족 음악에서 직접 취해진 것이 아니고 팔랴의 마음과 머리 속에서 다듬어진

끝에 새로운 창조물로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제된 민속적인 어법은 시대가 요구하는 근대적 미감에도 잘 일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팔랴는 야나첵이나 시벨리우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바르토크나 프로크피에크, 스트라빈스키 등과 같은 차원에 서는 근대 민족주의의 대가로 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팔랴는 어느 의미에서 19세기적인 껍질을 남긴 정서적인 것에 호소하는 민족주의 악파의 길을 건너 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조류를 실감나게 느낀 팔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로서의 준엄한 책임감에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당시에 일어난 신 고전주의의 영향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한 것은 팔랴 자신속에 들어 있는 미의 핵심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마음이었다.

1923년에 완성된 특후한 '인형극 오페라', <페트로 두목의 인형극>에는 활기에 찬 리듬이나 안달루시아 인다운 멋진 유머가 아직 도처에서 엿보이고 있지만 팔랴가 맞이한 큰 전기가 분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거기에는 안달루시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각 지방에 걸친 민속음악 탐구의 성과, 카베손이나 빅토리아 등 옛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에 대한 진지한 향수가 나타나 있다. 곡의 구성은 풍만한 색채를 느끼게 하는 화성보다도 준엄하고 간결한 선을 중시하는 것으로 변해 있다. 1924년에 발표된 실내악 풍의 반주를 가진 유연한 가곡<프시케>(프랑스 어의 시에 의한..), 1927년에 만들어진 하프 반주의 준엄한 가곡 <코르도바에 부치는 소네트>에서도 각각 곡의 분위기는 다를 망정 기본적인 간결함은 같다.

그리고 그런한 '새로운 팔랴'의 길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태어난 것이 1926년에 회수로 4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하프시코드 협주곡>이었다. 독주 악기의 음량을 감안해서이겠지만 배경을 5개의 악기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바이올린, 첼로)만으로 하고 모두가 간결한 엄격함과 길고 깊은 전통위에 선 참신함에서 생겨난 작품이다. 연주시간 15분도 안걸리는 곡이면서도 이 협주곡은 20세기 스페인 음악에 있어서 묵직한 이정표의 역활을 한 것이다.

특히 제 2악장 렌토에 나타난 어딘지 야릇한 도취를 수반한 엄숙함은 50세를 맞이한 팔랴가 그 정신의 깊음에서 떠올린 악상으로서 한 번 마음에 와 닿으면 잊을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이것을 스페인 사람들의 심오한 혼이라고 부를 것을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단순하고 깊은 음악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면 팔랴라고 하는 인물의 성격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기도 했다. 남아 있는 사진이나초상에서 보는 초췌한 볼, 크고 검은 눈,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 높고 오똑한 코, 일찍부터 벗겨진 이마는 마치 외곬으로 치닫는 구도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팔랴는 경건한 가톨릭 신자여서 만년이 될 수록 겸허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준엄함을 더해 갔다. 악보의 표지에 자기 이름을 내는 일조차 '필요없다' 고 그는 싫어했다고 한다. 어느 때, 팔랴의 이탈리아 여행에 동행한 음악가 호세 마리아 토마스는 길고 가파른 돌 층계의 길을 걸을 때마다 팔랴가 지팡이 끝으로 버려져 있는 과일 껍질을 빼놓지 않고 길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만일에 누가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성품이었던 것이다. 또 팔랴를 평생도록 가까이서 돌봐 준 조금 연하의 누이동생 마리아 델 카르멘의 추억담에 의하면 어느날 밤 팔랴는 불빛에 이끌려 수없이 방안에 날아온 날벌레들을 부득이 구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엷게도 너희들은 좋아서 들어온 것도 아닐텐데...."

그러한 그가 높은 사람들과는 접촉하는 기회를 되도록이면 피하고 가까운 이웃들과의 대화를 훨씬 즐겼다고 하는 것은 알만하다. "....(우리들 음악가는) 타인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순하게 헛되고 거만스런 의식을 떠나서. 그래야지만 예술은 존귀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임무를 다 할 수 있다."고 그는 쓰고 있다.

팔랴의 전기를 살펴보고 놀라는 것은 사랑에 얽힌 이야기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저 빅토리아와 같이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았던 그의 후반생을 돌보아준 것은 누이동생 마리아 델 카르멘이었다. 그러한 팔랴를 지나치게 근엄하게 살았고, 반 신경질적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고고한 사람에게는 타인에 대한 억지스러운 강요는 없고 그 대신 참다운 겸허와 선의(善意)가 있었다. 또 한편 이것은 작품에서도 추측할 수있지만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있을 때는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면도 보여주었다. 로르카를 비롯하여 그의 인품을 사모하여 찾아오는 그라나다의 젊은 시인이나 예술가들 앞에서 팔랴는 이따금 훌륭한 피아노의 즉흥연주를 들려주었는데 그의 18 번 앙코르 넘버에는 (그 자신이 이름을 붙인) <말할 수 없는 이랴디엘의 하바네라>나 <비길 데 없는 베니스의 사육제>가 있었다.

그런데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작곡한 이후의 팔랴는 극단적으로 작품수가적은 작곡가로 되어갔다. 특히 1930년대 이후에 발표된 작품은 겨우 관현악모음곡 <찬가> 한 편이 있을 따름이라고 해도 좋다. 이처럼 심한 과작의 원인으로는 건강상태의 악화 (류머티스, 신경증, 위장병...)나 예의 자기 자신에 대한 근엄함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해 갔다는 것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하나의 대작에만 몰두하여 다른 작품에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곡명을 <아틀란티나> 즉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붙인 이 곡은 태고의 대서양에 떠있던 전설의 대륙을 다룬 장대한 서사시적 칸타타로 구상되었다. 항구 도시 카디스에서 태어난 팔랴의 마음에는 어려서부터 전설을 간직한 유구한 바다와 하늘에의 동경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때 읽을 수 있었던 하신토 베르다게르(1845-1902)의 명 서사시 <라 아틀란티다>에서 그가 많은 감명을 얻은 것도 말하자면 필연의 일이었으리라. 베르다게르는 근대 카탈로니아의 대시인으로 불린 사람인데 깊은 정감과 기품을 담은 종교적 시편을 많이 남기고 있다. 팔랴는 이 카탈로니아 어로 된 긴 서사시를 칸타타용텍스트로 엮어서 1920년대의 끝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칸타타는 바다에 뭍힌 아틀란티스를 테마로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큰힘을 가진 헤라클렛, 머리가 셋달린 게리온, 그런가 하면 일전하여 이사벨 여왕이나 뱃사람 콜럼부스가 등장하여 결국은 광대무변한 조물주의 대업을 심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세속 칸타타의 형을 취했지만 <아틀란티다>는 팔라가 필생의 소원을 담은 '그의' 종교악곡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여기서 인상에 남는 그의 말을 하나 상기해 두고 싶다.--- "나의 평생의 소망은 한편의 미사곡을 쓰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종교 악곡을 어떻게 작곡하면 좋을지 그 방법을 못찾아냈다. 만일 내가 그레고리오 성가나 예전의 폴리포니 악곡을 흉내낸 모작을 쓴다고 하면 그것은 근대음악의 풍성한 과실을 신 앞에 바치는 것을 태만히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아틀란티다>가 남이 보기에는 전혀 지지부진하게 밖에는 진행되지 않고 결국은 완성을 보지 못한 것도 팔랴가 이 '기도'를 신의 마음에 맞도록 만들고 싶어 한 나머지 세부에 마음을 너무 많이 쓴 결과였다.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팔랴는 약간씩 여행을 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 초청되어 갔었고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에도 한동안 체재한 일이 있었다. 1936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 팔랴는 전에 없는 건강을 되찾았고 이만하면 <아틀란티다>도 완성시킬 것이라고 매우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마침 그 해 7월에 일어난 우익의 봉기(스페인은 1931년 부터 공화제를 택하고 있었다)는 팔랴의 행복감을 일거에 부셔버렸다. 그라나다는 곧 계엄령 하에 들어갔으며 길에서는 언제 탄환이 날아올지 모르게 되었다. 8월에는 끔찍한 사건이 그라나다를 엄습했다.어느모로 보든 무고한 시인 로르카가 이 시의 주권을 장악한 우익 세력에 갑자기 납치되어 며칠 동안의 구류조차 두지 않고 총살당한 것이다. 로르카의 양친으로부터 체포의 기별을 받은 팔랴는 놀라서 담당요원과 석방 교섭을 하러 갔지만 일은 끝난뒤라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때 로르카 외에도 좌익 인민전선 쪽에 붙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리버럴한 사상의 소유자로 간주된 인물은 수없이 붙잡혀 죽었다. 팔랴는 지인을 살리기 위해 우익 지도자 앞에 나가서 조용한 분노를 담고 말했다고 한다.--"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해 주시오"라고. 하지만 이 순진한 음악가의 간청은 모든 경우에도 허사였다. 지친 나머지 팔랴의 심신은 전보다 더 쇠약해졌다. 3년에 걸친 내전동안 팔랴는 쥐죽은 듯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 동안 열심히 붓을 놀려한 편의 곡을 완성한 것이 드뷔시, 뒤카, 아르보스, 페드렐등 4인의 탁월한 선배 음악가들, 그리고 고인들을 추모한 모음곡 <찬가>였다

남보다 월등하게 깊은 신앙으로 산 팔랴는 <공산주의의 손에서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스페인 국체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라는 대의 명분아래 시작된이 내전을 만나 사상적으로 인민전산파나 개혁주의파에 붙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과 진리의 이름을 내걸면서 행해진 수많은 비참, 미쳐 날뛰는 증오를 눈앞에 보고 참다운 의미의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인 그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치에 대한 깊은 절망 뿐이었다. 이 내전만 없었더라면 <아틀란티다>는 그 자신의 손으로 완성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내전 후 얼마 안되어 1939년 가을, 팔랴는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스페인 문화협회>로 부터 그의 작품의 특별 연주회를 열고 싶다, 그리고 그 때 그를 아르헨티나로 초청하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팔랴의 마음은 움직였다.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악몽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스페인을 떠나고 싶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팔랴는 몇 안되는 우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호젓하게 고향 카디스에서 기선에 올랐다. 1939년 10월 2일. 이날 이후 팔랴는 두 번 다시 고향의 흙을 밟는 일이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팔랴는 한동안 아픈 몸을 무릅쓰고 지휘봉을 드는 등 활동을 보였으나 이윽고 내륙지 고르도바 주의 산간 알타 그라시아에 보양지를 정하게 되었다. <로스에스피니조스>,즉 <미모자관>이라고 불린 그 곳의 산장--오늘날 기념관으로 남아 있는 --은 푸른 나무와 꽃 향기에 싸여 있었지만 팔랴는 바람이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여 방 안에만 틀어박혀 초라한 피아노 곁에서 조금 씩 <아틀란티다>를 써 갔다. 이 검소한 은자의 가슴에 혼자 품고 있던 망향의 정은 다음의 에피소드가 말해 줄 것이다. ---팔랴의 방에 있는 두 개의 시계 중 하나는 스페인의 시간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1946년 11월 14일 아침, 여느 때나 다름없이 돌봐주는 여자가 팔랴의 방문을 노크하는데 대답이 없다. 마리아 델 카르멘이 그 말을 듣고 방에 들어가 본즉 70세의 탄생일을 9일 앞으로 남겨 둔 이 노 작곡가는 고통스러운 빛도 없이 온화하게 숨져 있었다. 유해는 카디스로 보내지고 그 곳에서 엄숙하게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후반생을 건 <아틀란티다>의 미완성 초고는 수년 후에 유족의 손에서 팔랴의 많지 않은 제자 중 한사람인 에르네스토 알프테르의 손에 넘겨졌다. 알프테르는 스승의 뜻을 이으려고 10년이 넘는 동안 노력을 기울여서 1961년에 드디어 보필 완성의 일을 마쳤다. 서곡과 3개의 부분으로 된 칸타타는 1961년,2년에 바르셀로나와 카디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그것을 들은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 클로드 로스탕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의 하나'라고 절찬의 말을 보냈으나 워낙 대작이어서 다시 연주되는 일이 없었다.

레코드가 실현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나 뒤였다. 1976년에 팔랴 탄생 100년 (사후 30년)을 기해 스페인의 국내외에서 기념 음악제가 개최되었는데 그 때 알프테르는 전에 완성한 스코어를 개작하여 보다 짜임새 있게 축소하였다. 다음 해 처음으로 녹음한 두 장의 레코드에 수록된 것도 이 제 2판이다.

이리하여 널리 들을 수 있게 된 <아틀란티다>는 팔랴의 유작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팔랴/알프테르 합작 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고 하더라도 로스탕이 평하듯이 20세기 음악 중 굴지의 '고귀함'을 갖춘 작품이다. 그리고 결코 귀에 아양을 떨지 않는 이 대작을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음악가 팔랴가 묘사한 궤적(軌跡), 자체를 인간의 진실과 결부된 아름다움에 부치는 경건한 기도의 도정으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http://gong.snu.ac.kr/~zflute/manue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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